오랫동안 꿈꾸던 목표가 있었습니다. 어디에 살아야겠다, 어떤 차 끌어야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될 거야 와 같은 구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돈 많이 벌어서 가족을 위해 써야지, 어려운 주변 이웃을 도와줄 거야 와 같은 꽤나 가치로운 것들도 있었어요. 꿈은 구체적으로 꾸어라. 생생하게 상상하라. 1000번을 써라.라고 알려주는 자기 계발 조언들 중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였으니까 100% 진심이었던 건 확실한 듯합니다.
현실과 목표가 상이할 때 오는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현실에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어요. 어딘가에 있는 나만의 유토피아를 끊임없이 찾아다녔습니다. 그곳만 찾아내면 지금의 이 고통이 단숨에 사라질 거라 믿었어요.
세상은 참 신기해서, 제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반드시 세상이 깨닫게 하더라고요. 저의 오랜 믿음이 허풍 같은 망상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은 심각한 공황장애를 앓게 된 덕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헐떡이는 숨소리와 심장 박동소리에 갇히게 되더군요.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 현관 손잡이를 잡고 실수를 한 일도 생겼습니다. 이유도 없이 말을 할 수 없게 되고, 시간이 이만 멈춰주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어요.
인생의 가장 깊은 바닥에 닿은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리가 완벽히 차단된 그곳에서 꽤 오래 머물렀어요. 그러면서 화려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땐 그 어떤 무엇이 아니라, 벌거벗은 나뿐이라고 느껴졌거든요.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목표 대신 지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강남 30평대 아파트, 제네시스 SUV, 하와이 여름휴가 대신 시간과 공간을 선택하며 일할 수 있는 삶, 내 손으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는 삶, 자연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삶, 조금 덜 소비하는 삶, 사람들과 많이 이야기하며 사는 삶 같은 것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선택이 조금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일 수 있게 되었어요. 나를 쥐어짜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물 흐르듯 사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 큰 부자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요.
지향 안에도 작은 목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의 뉴욕 워케이션 같은 거요. 재밌는 건 이 목표를 위해 지향들이 손을 잡습니다. 쇼핑과 배달 앱을 삭제하다던가, 커피 한 잔, 과자 한 봉지 같은 작은 소비를 줄이게 된다거나 새로 일을 시작함에 대하여 나름의 규칙을 가지게 되는 등 지향이 목표를 통해 구체성을 띠게 되는 것이죠.
목표를 설명할 때 징검다리에 자주 비유되는 것 같아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밟아야 하는 용도랄까. 그런데 요즘 제가 느끼는 목표는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에요. 지향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타고 흘러가는 와중에 발견하게 되는 아름다운 느티나무 한 그루가 목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나무를 목표삼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나답게 삶을 살아내다 보니 그 나무를 마주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목표도 꽤 낭만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목표는 달성하는 게 아니라 만나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과 제가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만나는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