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숲, 2024.04.05
오랜만에 탄 지하철에 아기띠를 하고 노약자 석에 앉았다. 옆에 큼직한 표지판을 보자 불현듯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임산부, 어르신, 아기띠 한 엄마, 다리를 다치신 분이 동시에 나타나 내가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면 과연 누구에게 양보하는 게 좋을까?'
갑자기 떠오른 질문에 나름의 호기심을 가지고 분주히 순위를 매기다가 어라? 이게 아니라 역으로 질문을 해야 될 거 같았다.
"누가 가장 위중해 보여? 누구에게 가장 자리가 필요할 거 같아?"
임산부라면 몇 개월인지 혹은 노산인지, 노인이라면 연세가 얼마나 되시는지 정정하신지, 아이를 안고 있다면 아이를 안으신 분이 많이 피로해 보이는지, 장애인이라면 얼마나 중증인지 등등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둘 거 같다.
단순히 네 사람을 떠올렸을 때 평소 생각하는 기준으로 마냥 순서를 매기기가 어려웠다. 대상이 가진 타이틀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살피고 관찰해야 할거 같았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이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점차 깨닫게 되면서 자연스레 주변에까지 확장하여 투영하게 된다.
발생하지 않을 일을 상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바쁘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 피식 웃음이 난다. 그러면서도 더불어 꼬리를 물고 질문하면 빠지지 않는 인물 피터 드러커가 떠오른다. "질문이 없으면 통찰도 없다" "심각한 오류는 잘못된 답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 정말로 위험한 것은 잘못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절실한 질문은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정하여 던지는 질문보다 현재 나를 직시하는데 필요한 질문들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나를 대면해야 하는 질문들 앞에 두려움이 앞서는 건지도 모른다. 나를 들여다보는데 자연스럽고 익숙하다고 생각해 왔기에 이런 두려움이 낯설면서 당혹스럽다. 할 이야기가 있다며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면 참으로 불편해하던 남편처럼 진지하게 나와 대화하려 하니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나를 보는데 편해지지 않은 시점에 ANDA를 통해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글쓰기를 하게 된 건 우연인 듯 필연일까.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생각해 볼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의 파편의 조각을 맞추면서 나를 재발견하고 잊힌 나를 찾을지도 모른다. 불안과 긴장 속에 또한 감출 수 없는 기대감을 안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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