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죽음을 말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어
모퉁이를 돌자 장례식장이 나왔다.
“여기가 어디예요?”
4살 첫째가 물었다.
외할머니 생신이라 할머니댁에 간다고 해놓고, 차로 1시간 남짓 달려 난생처음인 곳에 와 있으니 그의 질문은 당연했다.
“사람이 죽으면 안녕히 가시라고 모여서 인사하는 곳이야.”
‘죽으면’이란 구절을 작은 목소리로 재빨리 말하고는 아이를 슬쩍 보았다. 잠에서 깬 그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이 이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날은 엄마의 생신이자 고모부의 입관일이었다. 고모부가 갑작스럽게 임종하시며 엄마의 음력생일과 장례일정이 그렇게 겹쳐졌다. 장례식장으로 갈 채비를 하면서도 나는, 아이가 장례나 죽음에 대해 질문하면 어떻게 하지 하며 불안했다. 요즘 첫째는 내가 말하는 모든 문장에 ‘왜’를 붙이는 때라 질문공세가 이어질 게 뻔했다. 정답 없는 답안지를 준비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대충이나마 끄적여놓은 메모도 없이, 질문공세를 받아낼 처지에 놓인 미래의 내가 한숨을 쉬었다.
차에서 내려 빈소로 향하다 친척들이 잔뜩 모인 자리에서 아이가 깔깔대며 장난을 칠까 걱정됐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잘 가시라고 인사드리러 온 자리니까 장난치면 안 돼.”
문장 말미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밑도 끝도 없이 “장난치면 안 돼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들렸으리라. 장난치면 안 된다고 반복해 말하고는 아이와 빈소로 들어갔다. 검은 옷을 입고 눈에 눈물이 그득한 사람들을 보자 아이는 장난칠 생각은커녕,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아빠에게 안겨 떨어지지 않는 아이를 뒤로 하고 나만 고인에게 국화를 건넸다.
밥이 차려지고 아이는 좋아하는 수박을 몇 개 먹고 나서야 평소와 같은 표정을 되찾았다.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난데없이 무당벌레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하루 전 할아버지와 곤충채집통에 넣은 무당벌레를 기어이 차에 들고 타더니, 이제야 생각난 모양이었다.
“진하야, 무당벌레 지금 차 안에 있어. 우리 이따가 풀숲에 놓아주자. 그렇게 차에 두고 오면 무당벌레 죽어.”
“지렁이처럼?”
“응, 지렁이처럼.”
“이제 그럼 꼬물꼬물 못 움직여?”
“응, 차에 계속 두면 죽어서 못 움직여.”
죽는다는 말에 아이는 며칠 전 집으로 걸어가다 만난 지렁이가 떠올랐나 보다. 매미와 개미, 애벌레를 좋아하는 첫째에게, 비 오는 날 길에서 만나는 지렁이는 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며칠 전 햇빛이 쨍쨍 내려쬐는 날 보도블록 위에서 본 지렁이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한참을 바라보다 지렁이가 왜 움직이지 않냐고 묻는 아이에게 ‘지렁이가 죽었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그 후로도 개미들이 엉겨 붙은 지렁이를 한참 동안 보았다.
아이에게 죽음은 움직이지 않는 지렁이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었다. '고모부가 죽었다'라고 표현하면 아이는 대번에 지렁이를 떠올릴 것 같았다. 부동의 상태를 부각해 아이에게 죽음을 모습을 그려보게 할 순 있었지만, 영 마땅치 않았다. 죽음이 그렇지만은 않기에 아이에게 원형의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말은 늘 신경 쓰였다. 아직 4살인 아이는 오늘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죽음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적합한 어휘를 찾아 죽음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웠다. 그것은 나의 죽음관과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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