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 겉으로 괜찮다고 답하지 못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구태여 해내는 끈기 같은 건 아예 없고요. 1만도 안 되는 북스타그램을 운영하면서 협찬과 광고를 가려 받기도 했습니다. 원하는 책이 아니면 함부로 받지도 소개하지도 않으니 "굶어죽기 딱 좋은 상"이란 말도 들었습니다. 맞는 말 같아요.
저와 비슷한 부류라면 아시겠지만, 까칠함을 유지하려면 수입이 줄어들고(물론 영원히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관계가 좁아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타인으로부터 칭찬 듣는 일을 기꺼이 포기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비난에 무뎌질 수 있는 다부짐도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굳이 까칠한 나로 살아가는 이유는, 나로 인해 해석된 삶이 진짜 내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소리도 파동이다. 즉, 빛은 소리와 비슷하게 행동한다. 소리는 진동수에 따라 음이 달라지고, 빛은 진동수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떨림과 울림>, 김상욱
대부분의 사람은 보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그 보이는 것이 빛이라는 미세한 떨림의 현현이라면요. 모든 떨림에는 고유진동수가 있고 그 고유진동수가 그것의 색과 형태를 인지하게 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감히 예측해보건대 저와 같은 '나' 집착 버들은 기꺼이 모든 것의 떨림에 나라는 진동을 흘려 넣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낄 겁니다. 그것이 곧 '나다운 삶'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으니까요.
세상 모든 것이 파동이라면 저는 지금 일생일대의 기회 앞에 서 있는 겁니다. 세상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선택은 곧 만물이 지닌 진동에 나라는 떨림을 섞어 넣는 것입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으로 나와 그, 두 사람의 진동이 뒤섞이며 새로운 진동을 만들어 냅니다. 내가 마신 차 한 잔이 몸과 만나 기존의 떨림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떨림에는 필연적으로 울림이 뒤따릅니다. 선택이라는 형태로 많은 것과 공명하고 있는 나란 존재는 실시간 생동하고 있습니다. 움직임은 날이 갈수록 고유한 진동수를 갖게 됩니다. 그것이 어느 시간 에너지와 만나면 엄청난 폭으로 증폭하게 될 겁니다. 그럼 비로소 사람들은 알게 되지요. "오, 너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요. 그제야 까칠함이 나라는 사람의 독특한 온전함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처음부터 샛길로 들어가면 방향을 바꾸기 어렵다. 첫 단추가 선입견을 만드니까. 그래서 시류와 무관한 보편적 주제가 기왕이면 나은 선택이다. 보편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상 수상 소감으로 말한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인 것이 맞다.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임경선
저를 인정하면 상대도 인정할 수 있게 되더군요. '나는 이렇게 생겼는데 당신은 그렇게 생겼군요?' 하고 상대를 들여다보는 여유가 생기는 겁니다. 가끔 대화를 하다 보면 상대가 별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항성에서 그 사람만의 빛과 색을 띠며 존재하는 모습을 목도하며,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의 참된 뜻을 깨닫고 몸서리치기도 하지요.
언제까지고 저는 저로 살고 싶습니다. 까칠하다거나 별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그저 저랑 결이 같지 않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 그들을 그저 '아, 당신은 그렇게 생겼군요?'하며 바라볼 뿐, 함께 진동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저는 저의 길을 갑니다. 일상의 작은 선택부터 취향을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고, 결이 맞는 마음이 원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적어도 어떤 일을 끝낸 뒤에는 "와씨! 나 겁나 멋있어!" 하고 자화자찬할 수 있는 선택을 하며 살려고요. 멋들어진 거 말고, '나는 나의 생을 산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다짐을 너무 거창하게 하고 있군요. 그럼에도 지금은 나로 존재하려고 애쓰는 중이니까, 또 한 번 크게 말해봅니다. "나는! 나의 생을! 산다!!"
지구를 사랑하는 마음만 잊지 않고 목적지로 설정해 둔다면 아무리 삐뚤빼뚤한 선을 그으며 간다고 해도, 가끔은 경로를 이탈한다고 해도, 심지어 잠시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더라도 다시 새로운 길이 나타나 나를 인도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