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선 작가의 책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 '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책을 읽겠는가'라고 반문할 만큼 비장했습니다. 질문에도 팬이 있다면, 나는 나에 대한 모든 질문들의 오랜 팬입니다. 팬의 핵심은 자부심이잖아요. 이 책으로 인한 비장함은 나다움러로서의 내 자부심과도 밀접히 연결되었을게 뻔합니다. 그러니 몰랐다면 모를까, 이 책을 알게 된 이상에는 읽지 않을 수 없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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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째로 탈탈 털어 나열하고 싶지만, 오늘은 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사실 평소 나이를 인지할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어느 순간 내 나이를 말할 일이 별로 없어졌을뿐더러(대개는 내 나이 같은 건 궁금해하지 않으니까), 종종 말할 기회가 생기더라도 어쩐지 엉뚱한데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게 될까 두려워 "전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당연히 답하지도 않고요"라고 말해왔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통성명이란 명목하에 나이를 공유하면, 그다음 절차가 꽤나 뻔하고 고루했습니다. 주로 내가 꼰대거나 상대가 꼰대가 되는 불편한 결론. 하여 유쾌하지 않은 종착역으로 향하는 기차는 출발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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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나이란 완수해야 하는 과업의 범위 같은 느낌이 듭니다. 10대는 공부를 해야 하고, 20대는 취업을, 30대는 결혼과 육아를, 40대는 집과 자동차 구매를, 50대는 자식들 대입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마치 누군가 To-do 리스트라도 짜놓은 것 마냥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과업 달성을 향해 갖은 애를 써가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도 역시 그중 하나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는요. 해야만 하는 것들 앞에서 ‘싫은데!’라고 꼬라지를 부리는 것이 저였습니다만, 그럼에도 결국 '싫어도 어쩌겠어'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죠. 그러다 지금은 '완전 싫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뭐랄까. 이제서야 비로소 '싫어할 권리'를 주장한달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나의 변화는 나이 듦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선배보다 후배가 많아지고, 어딜 가도 연장자에 속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의 다양한 어른들을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보편적인 기준을 뒷배 삼아 함부로 타인을 평가하고 심지어는 폄훼하기까지 하는 여러 어른들도 봤어요. 그런 누군가, 혹은 그 누군가가 나였을 때의 꼬락서니를 도무지 봐줄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와 과업 수행 여부에 따라 어제까지 멀쩡했던 사람도 순식간에 루저, 실패자로 만들어 버리는 그 오만한 태도가 구역질 나게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버렸습니다"
타인까지 이래라저래라 할 능력은 없으니, 일단 '나는 아니다'고 분명히 선을 그어버렸어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상대의 진짜 모습을 압니다. 그게 귀찮으니 나이, 성별, 지역 같은 것들로 대충 이름 붙여 미워하고 싫어하고 비난하는 거라 생각해요. 적어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조물주의 어여쁜 생김새를 들여다보는데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 시간과 에너지를 들인단 말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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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임경선 작가의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로 돌아오면, 21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표가 나옵니다. 작가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니 다음의 세 유형으로 갈리더라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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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나이 포기파'는 나이 드는 것에 대해 포기하는 경우,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나이를 먹는 셈인데 문제는 이렇게 가만히 두면 대부분의 사람은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퇴보한다. (중략) 너무 쉽게 퇴보해서 내가 퇴보하는 것조차도 의식할 겨를이 없다."
"둘째, '나이 의식파'는 나이 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나이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자는 사람들. 이는 '안티에이징파'와 '자연주의파'로 또 한 번 나뉜다."
"그러다 세 번쨰 유형을 발견했다. 몇 살이 되어도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유형이다. (중략) 다시 말해서 괜찮은 어른으로 나이 드는 일은 오히려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연령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들은 작가가 주장하는 계보 중 어느 쪽에 해당하시나요? 아마 어느 한 쪽만 해당되는 분은 많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최소 양다리 혹은 삼다리를 하며 여러 파벌을 자유롭게 오가며 살아가시겠지요.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을 사는 농도가, 나이가 주는 고정관념을 희석시킬 정도로 충분히 진한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삶을 사느냐를 논하기 위해선 삶의 농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채성이 나이를 무력화할 만큼 충분히 진할 것 . 그것이야말로 '나답게 사는 삶'이라고 말하는 임경선 작가의 정의에 대단히 동의합니다.
커피의 농도는 용액에 들어있는 용질의 상대적 비율(TDS, Total Dissolved Solid)로 표현한다고 해요. 커피의 진하다, 연하다의 개념이 곧 농도이고, 사람에 따라 농도에 따른 기호도가 다를 뿐이라네요. 진짜 놀라운 것은 대개 커피 한 잔 속 커피 용질의 비율이 2%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98~%는 아무 맛과 향이 없는 물이고, 단 2%가 커피를 연하거나 혹은 진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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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나 그리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지닌 98~99%의 형태는 서로 대단히 유사할 겁니다. 누구 나와 같이 세끼 밥을 먹고, 잠을 자며,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사는 누구나 다 아는 일상.
그런데 그중 2%가 우리 안에서 나를 구분 짓게 합니다. 24시간 중 2%는 28.8분이고요. 대략 하루 30분 정도의 시간을 고농도의 나로 농축되어 지낼 수 있다면, 나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만만하네요?!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이나 매력으로 설명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 부분이 나이보다 먼저 명징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라는 사람으로 살고 있냐"라는 질문에 여전히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양이 아닌 질의 농도를 보장하는데 자신 없기 때문입입니다. 주어진 틀 안에 도대체 무엇을 농축하여야 나다울 수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이죠. 그 답을 임경선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 들어 필요한 건 '돈'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 자신으로 잘 나이가 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일'인 것 같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명징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일입니다. 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대단히 동의하는 말이기는 하나, 그것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대변하는 방식보단 먹고사니즘을 위한 방편으로 일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일이 곧 나요!"라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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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작가의 주장에 어떻게든 힘을 실어보고 싶습니다. 설사 생존을 위해 원하지 않는 일로 겨우 이 몸 하나 건사하고 있는 상황일지라도, 그 선택조차 나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선택이 쌓이면 내가 된다"
모든 선택은 나답다. 선택들의 합이 나고, 선택하지 않음 역시 선택이며, 그렇기에 내가 살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의 합이 나라는 생각. 예리해진 생각의 촉수가 여기까지 닿았을 때 "크으"하는 찬탄이 새어 나옵니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거리게 되지요.
어떤 방식으로든 나로 살고 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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