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 보내고 남는 것들
관심, 그 공평한 시그널
스무 살. 문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생활이 6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고등학생 때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대학생이 되었음에도 마음은 그다지 성장하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또 아버지가 대동되었지요. 생에 두 번,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졌던 순간입니다. 요즘에도 관심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시작하고 싶을 때 자주 그 순간을 떠올립니다. 꽤 오래 그럴 것 같아요.
그 실수는 늘 동아리를 하면서였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저에게 동아리라는 세계는 별천지였어요. 저는 영어 읽기 동아리와 합기도 동아리를 해보기로 결정했고, 과 내 학생회도 하겠다 자원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동아리 하나만 열심히 해도 벅차잖아요. 학과 강의를 듣고 나머지 시간 동안 여러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곳에 좋아하는 언니나 오빠가 있기라도 한다면, 동아리 생활에 올인! 대학생활을 떠올리면 동아리 활동만 생각나는 분들도 적지 않을 거예요.
저에게는 영어 동아리가 그런 곳이었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멋진 오빠들이 너무 많았어요! 나도 그들과 같은 관심사를 가졌다고 어필하고 싶었습니다. 공휴일에도 괜히 동방에 갔어요. 영어발표를 하기 전에는 학과 교수님께 찾아가서 모르는 부분을 여쭤보기도 했습니다. 영어동아리에 열의를 내다보니 합기도와 학생회는 자연스럽게 뒷전이 되었습니다. 동아리 참여 초반에는 시간을 쪼개 모든 동아리 활동에 적극 참여했어요. 선배들은 열렬 신입생이 왔다고 환호했습니다. 점점 쉽지 않더군요. 과 학생회에서는 총무역할을 하다 보니 엠티 기획이나 과내행사준비로 해야 할게 많았습니다. 꾸준한 수련이 생명인 합기도는 매일 저녁마다 모임이 있었고요. 그러다 보니 영어모임에 참석해야 하는 날과 다른 동아리 일정이 겹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그만두어야겠는데 이걸 어쩌지.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가 되자 선배들과 안면도 텄고,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어찌나 어렵던지요. 내 발로 들어가 놓고 100일 만에 열정이 식은 사람이 되기 싫었습니다. 결정이 가벼운 사람이라는 인상도 남기기 싫었고요.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는 괜찮았지만 그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가 되는 것은 치욕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다시 아빠에게로 갔습니다. 고등학생 때처럼 말이죠.
"아빠, 합기도 동아리 회장에게 전화 좀 해 주세요. 아빠가 동아리 활동 금지했다고."
아빠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셨습니다. 어떤 충고나 조언도 하지 않으셨고 말없이 합기도 선배 전화번호를 받아가셨어요. 그리고 2년 전 고등학생 때, 광고동아리 선배에게 했던 것처럼 전화하셨습니다. 저는 그때도 그랬습니다. 고등학생 때 밴드부와 광고 동아리 두 개를 동시에 하던 저는 어느 순간부터 밴드부에서 드럼만 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려면 광고동아리 선배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해야 했죠. 그런데 그게 그렇게 두렵더라고요. 축제 때 상영할 광고 영상물을 제작해야 해서 바쁜 시기기도 했습니다. 밴드부 역시 축제의 꽃인 가요제 무대에 올라야 했기에 연습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아빠에게 요청했어요. 아빠는 광고 동아리 회장에게 전화 했습니다.
"OO고등학교 광고부 아무개지요? 저는 달하 아빠입니다. 우리 애가 요즘 성적도 떨어지고 매일 늦게 들어와요. 동아리 활동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애 엄마와 상의했고 모임 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 날 광고 동아리 모임 시간, 저는 선배가 뭐라고 하지 않을까 주눅이 들어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다고 선배를 만나러 가서는 '부모님의 뜻 때문에 하지 못해요'라는 표정으로 앉아있었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 선배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학에서 만난 합기도 선배는 달랐어요. 아빠가 전화를 하고 이틀쯤 뒤 그는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저에게 동아리 활동이 어떤 지부터 몇 가지를 물었죠. 그리고 말을 이었습니다.
"달하야, 그런데 그게 아버지가 전화를 해야 했던 일일까? 그전에 나한테 먼저 와서 이야기하고 그만둔다고 얘기해도 괜찮았을 텐데. 나도 당황스러웠고 무엇보다 이제 우리는 대학생이잖아. 부모님이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나이기도 하고."
그의 말처럼 저는 대학생이었습니다. 결정했던 것을 정중하게 철회하는 방법을 모른 채 몸만 커버린 대학생이요. 그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아빠를 탓한 적은 없습니다. 부모님은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제가 자연스럽게 배우게 될 거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