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L] 검정 지우개
사무실을 내놨다.
작년 9월에 이사왔으니, 어느덧 9개월 차. 처음 이사왔을 때부터 '2024년 6월에 이사한다'고 창문에 적어두었었고 가능하다면 더 빨리 나갈 작정이었다. 처음 이사 올 때부터 이사를 계획해두었음에도 막상 변화를 앞두니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점에서 두렵고도 재미있다. 스스로 선택해서 변화를 만들어나가야만 하니까.
그러다 오전에 작은 사건이 있었다.
오늘은 오전부터 내가 세워둔 일정대로 차근차근 하루를 밟아나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잠시 앉아 3분 남짓 짧은 명상을 하고,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고 양치를 했으며, 3페이지 가득 글을 적어보는 모닝페이지도 했다.
계획대로 정해진 작은 일상들을 착착 실행해가며 나의 미세한 불안을 가라앉히고 있었고, 헬스장에 가서 샤워를 하고 책을 몇 페이지 읽으면 오전 일정을 모두 마치는 것이었다. 샴푸와 린스를 가방에 챙기고, 5층인 사무실에서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1층에 다다르니 관리실할아버지가 유리 출입문 바깥쪽에서 유리를 닦고 계셨다. 평소에는 괜스레 식사하셨는지 여쭤보기도 하고, 커피를 사다드리기도 하였으나오늘은 그냥 지나치고싶은 마음이 컸다. 인사를 하고 빠르게 지나치려는데 어김없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셨다(평소에도 말을 무척 자주 거시는데, 딱히 알맹이가 없이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말'을 하기 위해 '말'을 거는 느낌이다). 인사치레는 해야겠기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어... 너 여기 내놨니? (사무실 내놓았냐는 뜻)"
"네"
"어... 여기 안 나가면~ 너 어쩌려고 그러니. 기간이 얼마나 남았지?"
"2년 계약했는데 1년 정도 지냈어요"
"어... 그럼 안 나가면 1년동안 공돈 내야하잖아~ 안 나가면 어째?"
순간 내 안의 불안이 확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의 '사무실이 안 나가면 어쩌려고 그러니' 한 마디에 불안감이 치솟아 머리가 뜨거웠고, 부정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도망치듯 대화를 마무리하고 빠르게 헬스장으로 향했다. 그 자리를 곧바로 회피했음에도 부정적인 감정이 꼬리를 물고 나를 쫓아왔다.
이 기분을 내려놔야 하는데...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아도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된 느낌은 그대로였기에, 뜨끈한 물에 몸이라도 담그자는 생각으로 탕에 들어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신기할만큼 곧바로 몸에 있던 긴장이 녹아내렸다. 탕에 몸을 반쯤 담그고, 상황과 감정에서 두세걸음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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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 때문에 불안감에 압도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가만히 내 패턴을 바라보았다.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지금까지 '말 한마디' 때문에 온갖 불안에 휩싸였던 여러 상황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특히나 타인이 별 생각없이 툭, 던지는 말에 내 온몸이 불안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한발짝 물러나서, 진짜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무언가를 결정하고 나면, '혹시 안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아예 외면해버리곤 했다. '혹시'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일을 그르치게 만들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타인의 입에서 애써 외면했던 '혹시 - 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우려를 들었을 때, 그 우려를 직면하게 되면서 불안감에 압도되어버렸던 것이다. '상대의 말도 일리는 있네-'하며 참고 정도로 듣고 흘려버리면 될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과거에는 상대를 탓했다. '굳이 뭐하러 저런 말을 하나?', '응원한다고, 좋은 말만 해줘도 될 텐데 왜 부정탈만한 말을 하지?'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오늘, 우연찮게도 목욕탕에서- 내가 불안에 휩싸인 진짜 이유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애써 외면했던 우려가 현실이 될까 두려웠던 거다. 현실이 될까 두려워하던 우려를 '타인의 입'에서 확인하는 순간, 그 두려움을 꽉 움켜쥐고서 불안에 휩싸여버렸다. 그리고는 상대방을 탓했다. 매번 두려움을 움켜쥔 건 나였다.
그러자 재밌는 일화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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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떄였나, 대학생 때였나? 어쨌든 꽤 자랐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침대 밑에 주먹만한 검정색 물체가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 막대기를 가져다가 그 검정색 물체를 툭 쳐보았는데,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닌가. 나는 비명을 지르며 엄마에게 달려가 "침대 밑에 쥐가 있어!!!"라고 했고, 엄마와 나는 침대밑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1시간 넘게 진땀을 뺐다.
웃긴 게 뭔지 아는가.
나중에 알고보니 그건 검정색 지우개였다. 그 지우개를 슬쩍, 곁눈질로 보고서 막대기로 툭, 쳤을 때 움직인다고 착각해 "쥐가 있다"며 난리법석을 피웠던 것이다. 손을 뻗어 꺼내보니, 손가락 두마디 남짓한 작은 검정 지우개가 잡혀나왔다.
두려워 스스로 외면하던 일을 '까짓거 한번 보자'는 마음으로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이 사실 '검정 지우개'일 뿐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실 우려했던 것 만큼 두려운 게 아니었음을, 웃길 만큼 별 것 아닌 존재였음을, 손을 뻗어 꺼내면 금방 치워버릴 수 있는 것임을. 심지어는 내게 도움이 되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다.
오늘 할아버지의 '혹시 사무실이 안 나가면 어떡하니?' 한 마디에 내가 불안감에 압도되는 것을 보며, '아- 내가 사무실이 나가지 않을까봐 두려웠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는 불안감에 압도될 때마다 그 불안감 자체를 '아, 내가 이것이 걱정되고 두려웠구나.'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바로미터로 쓸 수 있다. 불안이라는 검정 지우개에 손을 뻗어서, 마음에서 치워내고, 스스로의 마음을 깨끗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해야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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