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우주적 시선 그리고 죽음 안기
집에 있던 대용량 외장하드에 사진을 자동 업로드를 해오다 몇 달 전부터 구글 클라우드로 변경하기로 했다. 클라우드로 변경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업로드 속도가 너무 느려서였다. 남편은 클라우드로 사진을 옮기라고 말했고 나는 일상에 치여 계속 미루고 있었다. 사실 그것보다 사진정리는 마음을 단단히 잡고 해야 하는 정리해야 하는 일 중에서도 제법 크고 중요한 일처럼 느껴져 미뤄지게 되었다.
어느 순간 그 대용량 외장하드는 사라졌다. 그동안의 사진이 삭제되었는데 사진을 옮겼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없애버린 거였다. 그뿐만 아니라 연도별로 정리해 놓았던 별도의 미니 외장하드의 사진도 내게 물어보지 않고 모두 삭제해 버렸다. (남편 생각에는 내가 모두 옮겼을 거라고 생각했단다)
화가 났다. 당연히 엄청! 매우! 많이 화가 날 일이다. 남편에게 화가 났지만 그냥 다그치는 정도로만 화를 냈고 복구할 수 있음 해도라고만 했다.
이상한 일은 나에게 벌어진 일의 충격대비 내 안에서 일어나는 화의 감정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내가 아는 나는 사진을 중시했고 사진이 모두 날아갔다는 것에 엄청난 분노가 일어나고 화를 내야 마땅했다. 평소 신경질적인 성향으로 봐서도 길길이 날뛰고 아마 방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화를 삭이려고 하고 남편에게도 일어나는 분노를 아주 투명하게 표출했을 나였다.
평소와 다른 차분한 나의 감정상태에 왜 그런가 생각해 봤다.
나도 모르게 기록이 사라지는 경험은 많이 했다. 싸이월드가 그랬고 다음 블로그가 그랬다. 없어진 지도 모르다가 한참 뒤에 우연히 찾았는데 없어져 있었다. 백업 기간마저 놓친 거다. 유럽여행을 하고 와서 며칠 되지 않아 핸드폰을 잃어버려 여행 사진도 다 없어진 적도 있다. 잃어버린 핸드폰 보다 사진을 날린 게 너무 아까워 며칠을 속앓이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과거의 경험으로 단련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최근에 가진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나의 시간과 존재는 먼지 한 톨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중요하다고 생각해도 사진 또한 죽어서 가지고 가지 못하며 우주적 시각으로 본다면 이 또한 작은 사건인데 이걸로 감정에 태풍을 일으키고 남편과의 관계까지 해칠 이유가 없었다.
남편은 금액까지 지불하며 복구 프로그램을 돌렸지만 결국 사진을 살리지 못했다. 난 오래 키운 반려동물을 보내는 마음으로 이미 떠나버린 것을 놓아주기로 했다. 돌이 킬 수 없는 일은 그것에 매여서 나를 갈아먹는 것보다 빨리 빠져나와 다음 스텝을 준비하는 게 맞을 거 같았다.
어떻게 죽을지를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인다고 한다. 최근 죽음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죽은 상태가 된다는 것을 종종 떠올렸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들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죽음을 자주 떠올린 상태에서 사진이 날아간 사건은 감정의 동요를 별로 일으키지 못했다. 마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사진을 날린 게 별 일이 아니듯 말이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 느낌과 무거움을 이겨내고 죽음을 마음에 안고 산다면 감정적 소모와 내적 에너지를 덜 수 있을 거 같다. 거기에 더해 매일 잘 지켜지지 않는 우순순위를 해나가는 일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우주적 차원으로 바라본다는 느낌을 갖게 된 건 아이의 과학 동화를 읽어주면 서다. 만 3살 아이에게 태양계를 알려주는 동화는 꽤나 신기하고 재미있나 보다. 덕분에 매일 잠자리에서 같은 동화책을 계속해서 읽어 줘야 했다.
태양계에 있으며 더 큰 우리 은하에 살고 그런 은하가 또 수없이 펼쳐진 우주에서 우리는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 뭔가 풀리지 않은 일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서 보면 선명하게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기서 좀 더 많이 떨어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참 별 볼 일 없는 일도 많아진다. 그러니 이건 어쩌다 한 번씩 떠나는 여행정도로 생각해 보련다. 내 몸과 눈은 아직 서너 평의 공간에 있는데 너무 자주 떠나는 우주여행은 자칫 안드로메다로 갈 수도 있을 거 같다.
사진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나의 아쉬운 감정들만 남아있다. 내가 죽음을 생각하고 우주적 차원으로 바라보아도 사진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올 수 없는 것에 나의 감정과 느낌을 남겨두기보다 보다 유동성 있는 내 감정과 시선을 복구하려 힘쓰던 남편의 뒷모습에 두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