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적엔 나이 마흔이 넘으면 꽤나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삶의 답 정도는 껌으로 알고요. 하이힐을 신고 반짝거리는 회사 로비를 또각또각 걸어 다니고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아빠가 이즈음 돌아가셨는데요. 제 기억에 아빠는 어른 중에 어른이었습니다. 지금 저처럼 헤매는, 겉만 어른이 아니고요.
나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나답게란 온 우주를 감싸고 있는 사랑을, 저의 모습 그대로 발현하며 살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그림자 같은 거랄까요. 애초부터 엄청난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큰 집에 사는 건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아, 부자의 경험은 하고 싶었습니다. 전 뭐든 경험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나답게 사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먹고사니즘은 왜 나답게 사는 것과 정반대에 있는 것만 같을까요? 잘못 살았나, 처음부터 내 생각이 틀렸나. 온갖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알아졌습니다. 이 과정이 있기에 더 많은 이들을 이해하고 편견 없이 사랑할 수 있단 것을요. 각자의 나다움을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 지금이란 것도요.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거창한 자격이나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돈이 엄청 많아 그럴듯한 무언가를 내세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말이에요. 열심히, 애써서 사랑할 수는 있는 사람입니다. 완벽하지 못합니다. 완벽은커녕 실수투성이에, 이기적인 것이 저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아닌 사랑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저이기에 이렇듯 많은 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나 봅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집니다. 얼마나 실패하고 엎어지면 되는 걸까요? 앞의 문장을 쓰다 ‘이 마음이 작은 나로부터 온 것이구나.’ 싶어서 부끄러워졌습니다. 조금 대책없는 말입니다만, 저의 미래나 안위는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아닌 신의 몫이라 생각하거든요. 제가 할 일은 따로 있습니다. 어찌하면 이 몸뚱어리를 갖고 투명하게 신의 사랑을 투영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
오늘 아침 성당에서 들은 강론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었습니다. ‘지금 그대는 온전히 올인하셨습니까?’ 불쑥불쑥 솟아 나오는 부끄러움은 이 때문이었나 봅니다. 마치 선택의 문제인것마냥 나답게 살고 싶은 마음과 먹고사니즘에 한 발씩을 걸친 채 가늠질하고 있었거든요.
먹고사니즘을 해결하면서, 사랑의 증거가 되고, 현생의 나를 온전히 인정해 주는 일. 이 세 가지가 나란히 줄을 맞춰 설 때, 비로소 삶이 나답게 빛날 거라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