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창문을 열었다. 겨울이 가다 놀라 돌아볼 만큼 크게, 열어젖혔다. 날씨는 쾌청했고 그야말로 봄이었다. 20도쯤 되려나. 온도계 LED가 현재 기온이 19도임 알렸고 밖에 나가서 놀으라는 듯, 웃는 해님칸에도 불이 켜졌다. 나 역시 활동하기에 최적의 온도였다. 창문을 열었던 것처럼 큰 동작으로 이불을 개고, 뽀얀 물이 사라져 맑은 물이 보일 때까지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지금 내 삶의 온도가 20도, 아마 그 언저리 어디겠지? 2년 전 내 삶의 온도가 40도쯤 되었을 땐, 나는 쌀을 다 씻지도 못한 채 부연 물에 밥을 지었다. 자신의 높은 체온에 정신이 없었고 그래서 쌀뜨물이 맑아지길 기다릴 시간도 없었나 보다.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한창 40도 인간이었다. 그때의 나는 쿨다운 타임 없이 다시 러닝머신에 오르는 사람, 아니 황소 같았다. 첫째는 돌이 막 지났고 병원에서는 재택의료팀 의료진으로 환자들의 집에 방문하면서도, 머리 한 켠에서는 써지지 않는 논문과 씨름을 했다. 여러 병원들이 함께하는 임상연구를 셋업 하며 동시에 복지부 발주 보고서를 작성하는, 그야말로 매일이 '원고마감일'의 연속이었다. 1도씩 몸에 열이 오르던 어느 날,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한 장면처럼 내 머릿속 '앵그리'가 빨간 얼굴을 폭파하며 외쳤다.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게 말이 돼? 이게 말이 되냐고?'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을 '내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설정해 두었고 목표는 늘 일과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일이 많다고 소리칠 수는 없었다. 심혈을 기울여 정한 목표가 타인의 목표는 아니었는지 들여다보는 일은 늘 괴로웠으므로, 괜히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불평했다.
환기가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내가 고심해 내린 처방은 현 상태에 '감사하기'였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감사했다. 남편과 시부모님이 아이를 잘 돌보아주어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음과 나의 건강함, 경제적 안정 등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그 대상이었다. 하지만 감사하다고 쓰면 그때 뿐, 당시 내가 했던 감사는 대상을 잘못 찾았을 뿐더러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샘솟는 것이 아니었기에 삶으로 흘러들지 못했다. 삶에 활력을 주지 못했기에 나는 더욱 더 그때의 감사를 "가짜감사"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삶을 향해 불만을 터트리는 목소리를 세밀히 들어볼 차례였다. 그 불평은 운전을 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신호등에 빨간불이 많이 켜진다고, 주차장에 자리가 없다고 투덜대는 차원이 아니라, 삶의 차원이었으므로. 차라리 '불만이 생긴 것'에 감사하며 실은 먼저 살펴야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일하고 출근하면 다시 일하고,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
반문할 여지없이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좀 이상하긴 해.'
내 삶에 공존하는 불만과 감사 중 '불만'이 제 몫을 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다르게 생각해야 하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엔 사실, 늘 그가 첫 스파크 터트리기를 담당했다. 불만은 불꽃을 일으켜 다음 일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데 자기의 에너지를 쏟았다. 그 덕분에 나는 일주일에 한번 새벽 6시에 함께 독서할 사람들을 찾아 나설 수 있었고, 그렇게 22년 4월에 이혜와 숲을 만났다. 불만이 제 몫을 하고 사라진 자리에서 감사함이 더욱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을 마련한 나 자신과 건강하게 잘 자고 있는 나의 가족들, 새벽을 깨워 생각을 함께 나눌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이 건강함 등등. 어쩌면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였다.
첫새벽모임을 즐겁게 마치자 차례차례 '향기', '썬', '물'이 ANDA라는 이름으로 모일 수 있었다. 슬며시 펼쳐놓은 관심사들이 우리들을 한 곳으로 이끌었다. 각자가 삶의 좌표에 22년 봄에서 여름쯤, 책읽기나 글쓰기, 명상하기 같은 것들에 가로점을 찍어둔 모양인데, '타인과 함께'가 세로점이 되었는지 그것들이 묘하게 교차해 우리들은 만났다. 진실로 감사한 일이었다.
함께하자고 묻는 나에게 응한 그때, 그들의 온도는 몇 도쯤이었을까. 누구는 영하의 기온에서 자신을 데워야했을수도, 누구는 달구어진 자신을 식혀야 했을수도 있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냥 미지근했을는지도. 그런데 사실 과거 그들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어떻게든 우리들은 만났고 또다시 서로의 인과가 되어가는 것이 즐겁다.
일상에서 따뜻한 응원을 받으며 새로운 도전을 외치면 열성적으로 환대받는 '사람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우리들은 모두 다 성격이 다르고 좀 유별스러운 데가 있는데, 그렇기에 각자의 개성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것은 아닐지. 조금 더 달궈진 이가 온도를 나누고 그렇게 서로를 데우고 또 식혀나가며, 자신이 머무르기에 쾌청한 온도를 찾아간다. 함께 머물며 나는 또 영상 40도와 영하 40도의 삶을 넘나들겠지만 그들이 있기에 마음이 놓인다. 우리들은 자연스러워 서로를 돌보는지도 모른 채, 어쩌면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사랑을 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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