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L. 240402
새벽 네시, 생후 7개월 차 둘째가 오늘도 어김없이 머리를 긁다 깨 버렸다. 아가의 동그래진 눈에서 더 이상 잘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그를 안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 한켠에 늘 켜져 있는 조명이 식탁을 비추고, 그 위에 어제 사둔 캔커피가 눈에 띄었다. 죄책감이 먹기를 망설이게 하는데, 왠걸 이 시간은 캔커피를 마시기에 제격인 듯 했다. 이내 나는 그것을 손에 들어 한 모금 들이켜며, 내 앞에 오뚝이처럼 앉은 아가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너 때문에 먹는 거야."
새벽은 아가를 돌보기 위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깨버린 나에게, 그거 한잔 마시면 어떠냐고 말하는 듯 했고, 하늘에 어스름달이 그게 뭐 별 거냐며 그의 말을 거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 아가, 커피가 나란히 앉았다.
새벽에 아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첫째는 남편과 시터 이모님이 맡아 돌봐주었으므로 나는 일하고 책을 읽으며, '아가돌보기"는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 같은 사람은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해야하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오랜 시간을 갔다. 쌓인 시간과 내가 부여한 의미만큼, 그 문장은 의식의 확장을 막는 높은 벽이 되었다. 그랬기에 생산성과 비생산성을 따지는 생각이 일의 높고 낮음을 가르고, 결국 사람의 귀천을 나누는 것으로 이어짐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가 ‘영문과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스스로에게 '특상품'이란 라벨을 붙여둠도 이즈음 알았는데, 그 사실은 자기소개를 할 때 잠시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지만, 결국 자존감을 높이는 데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내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만이 자존감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다만 자존감 또한 타인이나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여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있으므로, 나에게는 그저 내면을 향한 지속적인 친절만이 필요했다.
"이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치?" 아가가 초석잠 같은 손으로 내 얼굴을 탕탕 때렸다.
나는 작년 9월에 둘째를 낳고 퇴사했다. 이때 직원증을 반납하며 대학병원에 근무하면서 잠시 빌려왔던 자신감을, 함께 돌려주기로 했다. "이전에 00병원에서 일했던 사람"으로 스스로를 지칭함은 현재의 나를 초라하게 하는 말 같아 멋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퇴사하고 난 후 자연스럽게 책 읽기에 몰두하게 되었나 보다. 책에서 나만의 멋을 찾아낼 힌트를 얻어볼까 하고. 그 시간들을 통해 나는 작가 헤밍웨이와 서머싯 몸, 성석제와 이주혜, 그리고 조해진을 만났다. 그들의 책을 읽으며 나는 이제서야 내 모든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게 되었다. 비로소 '염치'를 알게 되였달까. 다행히도 내가 내뱉지 않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내가 영문과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는데, 어렸을 때 가난했으면 더 드라마틱 했 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가난'은 내가 이런 방식으로 소비해 버릴 단어가 아님을, 책 <투명 인간>과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시대와 사회상이 맞물려 가난이 곧 비극이 되어버린 주인공들에게 "내가 가난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고 글로 꺼내어 남겨놓는 이유는, 조금 거창해 보이지만 '자발적인 간명'이라고 해야겠다. <주홍 글씨>의 헤스터가 스스로에게 다시 A를 쓴 것처럼, 잊지 않고 기억해야 비로소 변화할 수 있기에 궁여지책을 냈다. 그 글자를 묵묵히 오래 마주한 그녀가 A의 의미를 승화시키듯, 나도 그래볼 수 있을까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나의 책읽기는 곧 독서토론으로 이어졌다. 책을 읽으며 불편한 지점에 밑줄 그어보기로 끝나지 않고, 질문을 만들고 함께 읽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으로써 나는 염치의 적절한 용도를 정립하였고, 말하는 나를 지속적으로 의식했다. 분량 역시 고려해야 했으므로, 말하는 내용은 간결해졌고 그렇게 벼린 언어들로 마음을 탐색해 나갔다. 무엇보다 비판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들 덕분에, 생각을 숨김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말하는 것을 들음으로써,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돌아보았다. 작가 샘킨의 말처럼 말이다.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열린 마음과 가슴으로 듣는 신뢰할 만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을 스스로 들으면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내 목소리를 드러내기까지, 나는 이번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단 것을 먹었다'는 죄책감은 이제 내려 놓고, 안과 밖을 향한 여러 감각을 가져봐도 좋을 때이지 않느냐고. 언젠부턴가 나를 두드린 새벽과 어스름달의 격려에 답하며, 비로소 나는 내 이야기를 꺼내 보일 용기를 낸다.
당신이 양 손 가득 들고올 이야기를 맞을 채비를 하며, 생애 한 번, 맹렬히 바라본다.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연결될 수 있기를. 당신과 나의 목소리가 서로에게 살아갈 힘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어느덧 새벽은 아침을 향해 달리고, 아가는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활자가 되어 자기의 자리를 찾은 생각들이, 용기와 소망을 데려와 나란히 앉았다. 어스름 마저 걷히고, 희미한 해가 조용히 떠오른다.
* 『모멸감』(도서출판 문학과 지성사), 259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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