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한 현미밥을 한 그릇 가득 푼 후 반숙 계란 프라이를 그 위에 얹었어요. 어젯밤 기특하게도 고기, 버섯, 시래기, 양파를 가득 넣어 짭조름하게 된장찌개를 끓여두었거든요. 이제 이것들을 슥슥 비벼 입에 넣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라? 찌개 맛이 이상합니다. 네, 이른 더위에 폭삭 쉬어버린 것이었어요.
이런 일은 인간관계에서도 꽤 자주 목도됩니다. 죽고 못 살던 마음이 전생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어느 순간 이름도 잘 떠오르지 않을 만큼 뒤안길로 물러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책에서는 그러더군요. 시절이 다한 인연을 보내줘야 새로운 인연이 다가온다고요. 그런데 어디 마음이 그렇습니까. 한낱 물건에도 정을 붙이는데 하물며 사람이잖아요.
만나면 헤어짐이 있다는 말은 우리 엄마의 아주 오래된 지론인데요. 어릴 때는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이기보다는 흔쾌히 허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태도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을 꽃으로 물들이던 봄이 가고 여름이 발가락에 채이는 계절입니다. 말간 초록이 쏟아지는 요즘 날씨에 맞는 옷차림새가 있잖아요. 나에게 온 새로운 계절에도 그에 맞는 관계가, 사람이, 일이 있을 겁니다. 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 역시 달라져야 할 테고요.
쉰 된장찌개는 어찌 살려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맛있는 속 재료가 그득했던 된장찌개를 싱크대에 부으면서 생각했습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겠다고요.
우리 관계도 그럴 겁니다. 모든 인간관계에는 유통기한이 있고, 보내야 할 때가 오면 그저 시절 인연이 다한 것임을 알고 웃으며 손 흔드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한때 나의 삶을 스쳐간 상대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요.